재단법인 지덕사의 창립은 전주이씨 양녕대군을 파시조로 한 후손들이 대군의 위덕을 높이 받들고 사상을 후대들에게 전승시키며 숭조정신을 선양하는 것과 그 사적을 합리적으로 관리유지 및 구현하여, 발글.정리하고 보존.보급하기 위해서는 법인설립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되어 재단법인 지덕사가 창립을 하게 되었다.
1677년 | 임금이 예관을 보내어 사당에 제사를 올리게 했다. | |
1707년 | 임금이 수묘군(守墓軍) 7호를 사급하라 명하고 또 쌀 10석을 하사하여 사당의 중수(重修)를 돕게 했다.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아뢰어 이 명(命)이 있었다. | |
1711년 | 행장(行狀)이 만들어졌다. 외후손(外後孫) 통정대부 사헌부 지평 윤봉조(尹鳳朝)가 지었다. | |
1712년 | 묘지명(墓誌銘)이 만들어졌다. 외후손 숭정대부(崇政大夫) 원임 예조판서(原任禮曹 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지었다. | |
1717년 | 임금이 온천에 거동하시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대군묘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 |
1726년 | 임금이 사당을 수리하여 고치라 명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민진원(閔鎭遠)이 경연에서 아룀으로 이 명(命)이 있었다. | |
1727년 | 임금이 자손에게 녹봉을 주는 벼슬을 내리라 명(命)하였다. 이는 기주관(記主官) 신노(申魯)가 경연(經筵)에서 아뢰어 이 명이 있었다. | |
1737년 | 임금이 사당을 보수하라고 명했다. 병조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아뢰어 이 명이 있었다. | |
1750년 | 임금이 온양온천행궁에 거동하셨다. 좌승지 권일형(權一衡)을 보내어 묘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이는 낙창군(洛昌君) 당(?)이 차자(箚子)를 올려 청했기 때문에 이 명(命)이 있었던 것이다. | |
1757년 | 임금이 남관왕묘에 거동하셨다. 동부승지 이최중(李最中)을 보내어 사당을 자세히 살피게하고 탁지부(度支部)로 하여금 지붕을 수선하게 하였다. 이어 주사손(主祀孫)을 녹봉을 주는 벼슬을 내리라 명하고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곧바로 최중(最重)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 |
1765년 | 임금이 예비겸사 양종대(梁宗大)를 보내어 사당을 자세히 살펴보게하고 친히 제문을 지어서 우승지 김응순(金應淳)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 |
1770년 | 임금이 석우(石隅)에 거동하셨다가 관왕묘(關王廟)에 들르시고 친히 제문을 지어 황해도 관찰사 홍양한(洪良漢)을 봉사손 지광(趾光)의 배천임소(白川任所)에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 |
1789년 | 임금이 지덕사기(至德祠記)를 친히 지어서 판부사(判府事) 채제공(蔡濟恭)에게 현판을 쓰도록 명하고 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윤동섬(尹東暹)에게 명하여 사당의 액호(額號)를 쓰게 하였다. 이어 친히 제문을 지어 좌승지 홍명호(洪明浩)를 보내어 사당 액호를 걸고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이어 호조(戶曹)로 하여금 사당을 수리하여 고치게 하고 지덕사적(至德祠積) 및 경연에서 한 말을 책자(冊子)에 정서(精書)해서 한 권은 본가(本家)에 주고 한 권은 내각(內閣)에 보관토록 하였다. | |
1795년 | 임금이 현륭원(顯隆園)에 거동했다. 친히 제문을 지어서 병조참지 정약용(丁若庸)을 보내어 대군묘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 |
1804년 | 임금이 건릉(建陵)에 거동하여 예조좌랑 박성검(朴性儉)을 보내어 대군의 묘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 |
1826년 | 임금이 사당을 수리하여 고치라고 명하였다. 집의(執義) 박규수(朴奎壽)의 소청(疏請)에 의하여 이 명이 있었다 | |
1843년 | 임금이 건릉(建陵)에 거동하여 예조좌랑 마한랑(馬翰郞)을 보내어 대군 묘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 |
1845년 | 주사손(主祀孫) 승보(承輔)가 문과에 급제를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양녕대군의 사손(祀孫)이 과거에 급제를 하였으니 경하의 뜻을 표하시고 우승지 이정기(李正基)를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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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 임금이 건릉(建陵)에 거동하여 예조정랑 이병덕(李秉德)을 보내어 대군 묘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 |
1855년 | 임금이 관왕묘(關王廟)에 거동하셨다. 좌승지 심경택(沈敬澤)을 보내어 사당을 자세히 살펴보게하고 호조에 명하여 수리하여 고치라고 명했다. | |
1861년 | 임금이 관왕묘(關王廟)에 거동하셨다. 좌승지 홍석종(洪奭鍾)을 보내어 사당을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다. | |
1864년 | 주사손(主祀孫) 승보(承輔)의 아들 근수(根秀)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 집에서 과거에 급제했다는 명성이 나온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하고 우승지 강난형(姜蘭馨)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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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 임금이 양녕대군을 세종대왕의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할 것을 명하였다. 상호군 조득림(趙得林)의 소청에 의하여 이 명(命)이 있었다. | |
1866년 | 임금이 관왕묘(關王廟)에 거동하셨다. 좌승지 송희정(宋凞正)을 보내어 사당을 살펴보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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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 임금이 지종정경(知宗正卿) 이재원(李載元)을 보내어 사당을 자세히 살펴보게 한 후에 또 건릉에 거동하셨다. 종정경(宗正卿) 이봉의(李鳳儀)를 보내어 대군의 묘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 |
1870년 | 주사손(主祀孫) 승보(承輔)가 사신의 명을 받들고 연경(燕京)에 갔다. | |
1873년 | 주사손(主祀孫) 승보(承輔)가 사당을 중수(重修)하였다. | |
1874년 | 임금이 관왕묘(關王廟)에 참배하고 나서 판종정경(判宗正卿) 이화정(李會正)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지덕사는 원래 남대문 밖 도동(桃洞)에 있었으나 1912년 일본인들이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 |
2002- 2005년 | 3월 대군 탄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대군묘역 정화 | |
2005년 | 3. 29일 재실인 도광재(韜光齋) 준공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