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始祖) 한(翰)
우리 전주리씨의 시조의 휘는 한(翰)이요, 호는 견성(甄城)이다. 신라의 사공(司空)벼슬을 지냈다.
배위(配位) 경주김씨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 군윤(軍尹) 은의(殷義)의 딸이다.
연대 작가 미상의《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야사(野史) 실록(實錄)에 의하면 우리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이요, 자는 견성이시다. 공은 원래 중국에 살았었는데 하늘이 낸 성스런 인물로 남보다 총명하시고 재질도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15세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는데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나웠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그래서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가 서려 있다’라고 하였다.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략을 받아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들어오니 그 때가 18세였다. 이렇게 어리셨는데도 문장이 비범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탁월한 재능과 더불어 기품이 널리 떨쳤다. 우리나라로 오신 지 얼마 않되어 명성이 조정에까지 떨쳐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사공에 임명하니 정치를 하신 지 1년 만에 나라가 태평하여 온갖 벼슬아치들이 다 화합하고 온 백성이 모두 즐겼다.』
가) 전주(全州)의 연혁(沿革)
지금의 전북 도청 소재지인 전주시는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 : 比斯我?比自火)으로 554년(백제 위덕왕 1) 주를 두어 완산주(完山州)라 하였다가 565년(위덕왕 11)에 주를 폐하 였다. 백제가 신라에게 망한 뒤인 685년(신라 신문왕 5)에 주를 두어 다시 완산주로 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지금의 전주로 개칭하였다.
그 후 효공왕 때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라 칭하더니 936년(고려 태조 19) 후백제의 신검(神劒)을 토벌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개칭하였다가 940년(태조 23) 다시 전주로 환원하였다. 993년(성종 12)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로 개칭하였다가 995년(성종 14) 12절도사를 둘 때 순의군(順義軍)이라 부르고 강남도(江南道)에 예속되었다.
1018년(현종 9) 안남대도호부로 승격, 뒤에 다시 전주목(全州牧)으로 개칭되었다. 1355년(공민왕 4) 원나라 사신 야사불화(野思不花)를 거두었던 곳이라 하여 강등되어 부곡(部曲)이 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 다시 완산부로 복구 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조선 태조의 본관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 1403년(태종 3) 전주로 환원, 부윤(府尹)을 두었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두었다. 그 뒤 줄곧 전라도의 감영이 이곳에 있었다.
1895년(고종 32) 군이 되고 전국을 13도로 개편한 후 전북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1935년 부로 승격, 1949년 시로 개칭되어 오늘날에는 인구 30만의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첫 이름이 완산(完山)이었는데 나중에 전주(全州), 견성(甄城)이라고도 하였다. 완산은 원래 전주에 있는 산 이름이었다. 전주부의 남쪽 3리에 있었던 작은 산으로 고덕 산(高德山)으로부터 갈라진 산이었는데, 전주의 안산(案山)으로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였다.
또 부의 북쪽 10리에 있으면서 마이산(馬耳山)으로부터 갈라져 내려온 전주의 진산(鎭山)인 건지산(乾止山)과 마주 바라보이던 산이었다.
따라서 우리 전주리씨는 완산이씨(完山李氏)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대체로 전주리씨라 부르고 간혹 완산이씨라고 기록할 때도 있다.
 
나) 조경단(肇慶壇)
‘조경(肇慶)’이란 말은 ‘경사(慶事)가 시작된다’는 뜻으로 기쁨이 비롯되는 우리 전주리씨 의 시조의 단(壇) 이름으로만 쓰인다. 조경단은 우리의 시조 한(翰) 할아버지의 묘역(墓域) 의 이름이다. 다만 묘가 있는 곳이 불확실하여 단을 쌓아 놓고 제향을 지내니 조경단이라 하는 것이다.
이 조경단은 바로 전주의 진산인 건지산 왕자봉(王字峯) 끝에 모셔져 있다. 고종태황제가 친히 지은 ‘조경단비음기(肇慶壇碑陰記)’에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나라《선원보략(璿源譜略)》에는 시조의 묘소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전주는 곧 우리 왕실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다. 경기전(慶基殿) 전의(殿儀)에는 전주부 북쪽 10리에 건지산이 있으니 곧 시조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 하였고, 읍지(邑誌)에도 ‘건지산에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태조고황제가 나라를 연 직후에 그 산을 봉하여 지키게 하고, 전라도 책임자에게 잘 받들어 보살피도록 명하였다. 그러다가 영조대왕 때 이르러 실제로 묘역의 경계를 조사해 보았으나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근방의 백성들의 무덤을 파내게 하고 감독관과 산지기를 두어 경계를 확정하고 절대로 벌목을 못하게 하였다.
전의와 읍지에 이렇게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고 태조고황제와 영조대왕의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그 정성은 문헌으로 가히 징험될 수 있으되 지금에 와서는 아득하여 묘소를 알 길이 없으니 참으로 서글플 따름이다.
아! 이제 봉분을 높이 쌓아 올리고 싶으나 그 일이 극히 어려운 일이라 열성조께 서 미쳐 이루어 놓지 못한 것이리라.
이에 금년 봄에 재신(宰臣)을 보내어 왕자봉(王字峯) 아래 진좌(辰座) 언덕을 살펴보려 하였더니 전설에 내려오는 대로 아래 위로 무덤의 형체가 있다 하므로 사방으로 산의 경계를 정하는데 정조대왕은 산을 봉하여 수호하던 절차에 따라 양지척(量地尺)으로써 땅을 측정했다. 동서로는 3,360척이요 남북으로는 3,520척이다.
또 영건청(營建廳)을 설치하도록 명하여 산소 형체의 앞에다 제사지낼 단을 쌓고 ‘조경단’이라 부르라 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제사지내는 예를 올리게 하고 지키면서 받드는 관원 두 사람을 두어 모든 절차를 각 원(園)의 예에 따르게 하니, 대저 우러러 아득하게 넓음은 하늘이요, 단을 쌓아 제사를 지냄에는 제기와 제수가 제 자리를 차지하여 그 경건한 정성이 한결같을 것이로다.
선조의 시신이 묻힌 곳이 이곳이니 만약 산 전체를 묘역으로 봉한다면 어디에다 사모하는 정을 부치리요? 지금부터 자자손손 억만년 영구히 전례(典禮)가 되리로다. 아, 짐(朕)이 어찌 이런 전례를 만들었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열성조께서 겨를이 없어 실천하시지 못했던 것을 오늘을 기다려 이어 행 한 한 가지 일일 뿐이로다.
완산(完山)은 전주부(全州府)의 남산이요, 우리 왕실의 관향이다. 그래서 전부터 묘석이 있었는데 모두 마모되어 겨우 7자만 볼 수 있으니 ‘完山’과 ‘己亥五月立’뿐이다. 금년은 곧 기해년이요, 단을 쌓아 마치는 일도 5월이다. 하늘의 이치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도 때가 있어 꼭 부합함이 이와 같도다. 오호라!
이 비문은 고종황제가 친히 짓고 당시의 명필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썼다. 』
원래 조경단의 영역은 광복전까지 450정보 곧 135만평이나 되었었다. 그러나 광복 후 전북대학교 등 각종 관서의 부지로 거의 뺏기고 지금은 묘역과 재실을 합쳐 10만평도 남아 있지 않다.
1976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2세 자연(自延)
시조 한(翰)공의 아들로 휘는 자연(自延)이며, 시중(侍中)을 지냈다.
배위는 진양군(晋陽君) 윤자인(尹自仁)의 딸이다.
‘시중’이란 벼슬은 현재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3세 천상(天祥)
2세 자연(自延)공의 아들로 휘는 천상(天祥)이며, 벼슬은 복야(僕射)를 지냈다.
배위는 시랑(侍郞) 벼슬을 지낸 영일정씨 습명(襲明)의 딸이다.
‘복야’란 원래 중국의 당(唐)?송(宋) 때 재상의 별칭인데, 고려 시대는 정2품으로 부총리에 해당한다 하였다.
4세 광희(光禧)
3세 천상(天祥)공의 아들로 휘는 광희(光禧)이며, 벼슬은 아간(阿干)을 지냈다.
배위는 대장군 황지선(黃志善)의 딸이다.
‘아간’이란 벼슬은 ‘아척간(阿尺干)’, ‘아찬’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17등 관계의 제6위였다 한다.
5세 입전(立全)
4세 광희(光禧)공의 아들로 휘는 입전(立全)이며, 벼슬은 사도(司徒)를 지냈다.
배위는 한림(翰林) 백광선(白光善)의 딸이다.
‘사도’란 고려 때 삼공(三公 : 司馬?司徒?司空)의 하나로 정1품이었으며, 삼사(三師)와 더불어 임금의 고문이었다.
6세 긍휴(兢休)
5세 입전(立全)공의 아들로 휘는 긍휴(兢休)이며,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을 지냈다.
배위는 정언(正言) 벼슬을 지낸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
고려 시대의 ‘사공’은 삼공(三公)의 하나로 정1품이었는데, 임금의 자문에 응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관직이었다.
7세 염순(廉順)
6세 긍휴(兢休)공의 아들로 휘는 염순(廉順)이며, 벼슬은 생원(生員), 호장(戶長)을 지냈다.
배위는 첨대정승(僉隊政丞) 정익조(鄭翼祚)의 딸이다.
‘생원’은 옛날 소과(小科) 종장(終場)에서 경서(經書)의 뜻을 묻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8세 승삭(承朔)
7세 염순(廉順)공의 아들로 휘는 승삭(承朔)이며, 벼슬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생원 호장이었다.
배위는 시랑(侍郞) 백광현(白光賢)의 딸이다.
‘시랑’은 고려 때 육부(六部) 또는 육조(六曹)의 버금 벼슬로 조선조 때 참판(參判) 곧 요사이의 차관에 해당된다.
9세 충경(充慶)
8세 승삭(承朔)공의 아들로 휘는 충경(充慶)인데,《씨족원류》에는 광경(光慶) 혹은 극경(克慶)으로 적기도 한다고 했고,《목은집(牧隱集)》에도 충경(充慶)으로 씌어 있다 한다. 벼슬은 생원이다. 배위는 생원 윤자필(尹自必)의 딸이다.
10세 경영(景英)
9세 충경(充慶)공의 아들로 휘는 경영(景英)이며, 벼슬은 생원 호장이었다.
배위는 유수(留守) 윤필인(尹必仁)의 딸이다.
‘유수’는 수도 이외의 인근 도시 또는 행궁(行宮)에 두던 특수한 지방장관이다. 고려?조선조에 걸쳐 두었는데 중앙 관서의 직속 기관이었다.
11세 충민(忠敏)
10세 경영(景英)공의 아들로 휘는 충민(忠敏)이며, 벼슬은 장사(長史)이었다. 
배위는 대장군 최오헌(崔五憲)의 딸이다.
‘장사’라는 벼슬은 고려 때 동궁관(東宮官)의 관직으로 품계는 종7품이었으며, 또 육위(六衛)에 속한 종6품의 장사도 있었다. 조선조 때도 이런 관직이 있었는데,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에 속해 있었다.
12세 화(華)
11세 충민(忠敏)공의 아들로 휘는 화(華)이며, 추밀(樞密) 벼슬을 지내셨다.
배위는 대언(代言) 벼슬을 한 황진(黃璡)의 딸이다.
‘추밀’은 고려 때 왕명의 출납(出納)?숙위(宿衛)?군기(軍機) 등을 맡아 다스리는 관서 추밀원(樞密院)에 딸린 관원으로 추밀원사(樞密院使)?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가리킨다. 종2품?정3품 벼슬이었다. 그리고 ‘대언’은 왕명을 출납하는 벼슬로 승선(承宣)이라 고도 했는데, 나중에 승지(承旨)가 되었다.
13세 진유(珍有)
12세 화(華)공의 아들로 휘는 진유(珍有)이며, 벼슬은 생원 호장을 지냈다. 그러나《씨족원류》에는 일명 유진(有珍)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배위는 첨대중찬사(僉隊中贊事) 오대박(吳大朴)의 딸이다.
14세 궁진(宮進)
13세 진유(珍有)공의 아들로 휘는 궁진(宮進)이며, 한림(翰林)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씨족원류》에는 호장을 지냈다고 하였다. 배위는 장군을 지낸 이요(李潘)의 딸이다.
15세 용부(勇夫)
14세 궁진(宮進)공의 장남으로 휘는 용부(勇夫)이며,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씨족원류》에는 대장군 겸 태자청도솔부솔(太子淸道率府率)을 지냈다고 하였다.
배위는 정승을 지낸 이형(李珩)의 딸이다.
‘대장군’은 고려 무관의 벼슬로 상장군(上將軍) 다음, 장군(將軍)의 위로 종3품이었다.
16세 인(璘)
15세 용부(勇夫)공의 아들로 휘는 인(璘)이며, 내시집주(內侍執奏)란 벼슬을 지냈다.
배위는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시중(侍中)을 지낸 문극겸(文克謙 : 1122∼1189)의 딸이다.
17세 양무(陽茂) [생몰 : ? ∼1231]
16세 인(璘)공의 아들로 휘는 양무(陽茂)이며, 벼슬은 장군(將軍)을 지냈다.
배위는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이강제(李康濟)의 딸이다.
전주에 살다가 아들인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삼척 이주(三陟移住) 때 삼척 활기리(活耆里)로 옮겨 왔고, 거기에서 1231년(고려 고종 18) 별세하여 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노동(蘆洞) 신좌을향(辛坐乙向) 준경묘(濬慶墓)에 모셔져 있다.
배위 이씨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산리(東山里) 묘좌유향(卯坐酉向) 영경묘(永慶墓)에 모셔져 있다.
1899년(광무 3) 4월 16일 고종황제가 ‘준경묘?영경묘’라고 묘소에 존호(尊號)를 올리고 양쪽에 묘비와 음기(陰記)를 고종황제가 친히 지었다. 그 내용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 개국 초에 삼척군을 삼척부로 승격시키고 금관(金冠)과 옥대(玉帶)를 삼척 원에게 하사하고 도백(道伯)에게 명하여 해마다 두 묘소를 보살피게 했으나 점점 폐허화되어 선조 때 정철(鄭澈 : 1536∼1593)이 강원 감사로 있을 때 산소의 지도까지 그려 올려 수축하기를 요청한 일이 있다. 그 뒤 다시 수축하고 대대로 산소의 수호와 벌목의 금지 등 보호에 애써 왔다. 그러다가 1899년에 고종황제가 재상 리중하(李重夏)를 파견하여 묘소를 재정화하고 구역을 확정하고 비를 세우고 내력을 음기로 새기게 하였다.』
이로 보면 1899년부터 ‘준경묘?영경묘’라 추존되고 대대적으로 수축해 오늘의 모습이 갖추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장군’이란 벼슬은 고려시대에는 무관의 정4품 벼슬로 ‘대장군(종3품)’과 ‘중랑장(中郞將 : 정5품)’의 중간 직위이다.
또, 활기리에는 목조대왕이 살던 집터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무 장군 내외분의 묘소를 ‘준경묘?영경묘’라고 추존할 때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를 세웠는데 고종황제 어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준경묘?영경묘?재실?목조대왕구거유지 등을 합쳐 1981년 8월 5일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받았다.
양무공은 4남을 두었는데, 목조대왕 이외에 영필(英弼)?영밀(英謐)?영습(英襲) 3형제를 두었다. 그러나 영필?영밀은 자손이 없고, 영습공만 후사를 두어 선원선계 세번째 파계인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줄여서 주부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2) 선원세계(璿源世系) - 추존계(追尊系)
18세 목조대왕(穆祖大王)
17세 양무(陽茂) 공의 아들로 휘는 안사(安社)요, 고려 때에 벼슬하여 의주지사(宜州知事)를 지내고 원(元)나라로 들어가 벼슬하여 남경(南京) 오천호(五千戶)의 다루하치(達魯花赤 : 원나라 지방 관청의 장관직)가 되었다가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목왕(穆王)으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대왕이 인문성목(仁文聖穆)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1899년(광무 3) 11월 27일에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옛 살던 집터에 고종황제가 친히 쓴 ‘목조대왕 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 8자의 비를 세웠고, 1900년(광무 4) 1월 18일에는 전주 자만동(滋滿洞)에도 비와 비각을 세우고, 고종황제가 친히 ‘목조대왕 구거유지’라고 8자를 썼다.
능은 덕릉(德陵)으로 함흥(咸興) 서북쪽 가평사(加平社 : 現 咸南 新興郡 加平面 陵里)의 계좌(癸坐)에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함북 경흥(慶興 : 孔州)의 성남(城南)에 있었는데, 1410년(태종 10)에 이곳으로 이장하고 표석(表石)을 세웠다.
배위는 효공왕후(孝恭王后) 이씨(李氏)이다. 본관은 평창(平昌)이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공숙(公肅)의 딸이며 5월 15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효비(孝妃)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대왕이 ‘효공(孝恭)’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안릉(安陵)으로 목조대왕과 같은 언덕인데, 처음에는 경흥 성남 땅에 있다가 1410년(태종 10)에 이리로 이장하고 표석을 세웠다.
아들 6남을 두었다. 사자(嗣子)는 익조대왕이고, 차례는 넷째요, 장남은 안천대군(安川大君) 어선(於仙)이요, 차남은 안원대군(安原大君) 진(珍)이며, 3남은 안풍대군(安豊大君) 정(精)이요, 5남은 안창대군 (安昌大君) 매불(梅拂)이요, 6남은 안흥대군(安興大君) 구수(球壽)이다.
목조대왕은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공주(孔州 : 慶興)의 성(城) 남쪽 5리에 장사지냈다. 그 후 1410년(태종 10) 경인년에 함흥 서북쪽 가평사(加平社)의 계좌원(癸坐原)으로 이장되었다. 덕릉(德陵)이 바로 이곳이다.
19세 익조대왕(翼祖大王)
18세 목조대왕의 제4남으로 휘는 행리(行里)요, 함경도 덕원(德源) 적전사(赤田社)에서 태어났다.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이어받고 9월 1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태조고황제가 익왕(翼王)으로 추존하고 그 뒤 태종대왕이 ‘강혜성익(康惠聖翼)’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지릉(智陵)으로 함경남도 안변군 서곡면 능리 임좌(壬坐)에 있고 표석이 있다.
배위는 정숙왕후(貞淑王后) 최씨인데, 본관은 등주(登州)요, 호장 기열(基烈)의 딸이다. 9월 2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정비(貞妃)로 추존하고 태종대왕이 ‘정숙(貞淑)’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숙릉(淑陵)으로 함경남도 문천군 문천면 능전리 갑좌(甲坐)에 있고 표석이 있다.
익조대왕은 8남 1녀를 두었으니, 사자(嗣子)인 도조대왕은 차례로 넷째이다. 장남은 함녕대군(咸寧大君) 안(安)이요, 차남은 함창대군(咸昌大君) 장(長)이며, 3남은 함원대군(咸原大君) 송(松)이요, 5남은 함천대군(咸川大君) 원(源)이요, 6남은 함릉대군(咸陵大君) 고태(古泰)요, 7남은 함양대군(咸陽大君) 전(玲)이요, 8남은 함성대군(咸城大君) 응거(應巨)이다. 장녀는 안의공주(安懿公主)인데 증좌군도통제(贈左軍都統制) 주단(朱端)에게 시집갔다.
20세 도조대왕(度祖大王)
19세 익조대왕의 제4남으로 휘는 춘(椿)인데 처음 이름은 선래(善來)요, 몽고명은 패안첩목아이다. 함흥(咸興) 송두등리(松頭等里)에서 탄생하여 1342년(고려 충혜왕 복위 3) 7월 24일에 승하하니 고려 조정에서 찬성사(贊成事)를 추증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도왕(度王)으로 추존되고 후에 태종대왕이 ‘공의성도(恭毅聖度)’이라고 존호를 올렸다. 능은 의릉(義陵)으로 함남 흥남시 운남면 운흥리 임좌(壬坐)에 있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배위는 경순왕후(敬順王后) 박씨이니 본적은 문주(文州)요 원나라에서 천호벼슬을 받고 조선조 때 문하시중에 증직된 안변부원군(安邊府院君) 박광(朴光)의 딸이고 7월 23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경비(敬妃)로 추존되고 태종대왕이 ‘경순(敬順)’이라 존호를 올렸다. 5남 3녀를 낳았고 능은 순릉(純陵)으로 함남 흥남시 마전리 임좌(壬坐)에 있다. 표석이 있다.
5남 3녀를 두었는데 사자(嗣子) 환조대왕은 차례가 둘째요, 장남 완창대군(完昌大君)은 자흥(子興)이요, 3남 완원대군(完原大君)은 자선(子宣)이며, 4남 완천대군(完川大君)은 평(平)이요, 5남 완성대군(完城大君)은 종(宗)이다. 장녀 문혜공주(文惠公主)는 대장군 문인영(文仁永)에게 시집갔고, 차녀 문숙공주(文淑公主)는 다루하치 김마분(金馬粉)에게 시집갔으며, 삼녀 문의공주(文懿公主)는 허중(許重)에게 시집갔다.
21세 환조대왕(桓祖大王)
20세 도조대왕의 제2남으로 휘는 자춘(子春)인데 자도 자춘이다. 1315년(고려 충숙왕 2)에 탄생하고 고려때에 벼슬하여 영록대부(榮祿大夫)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삭방도만호겸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를 지냈고, 1360년(고려 공민왕 9) 4월 갑술일(《태조실록》에는 庚戌日)에 승하하니 46세였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환왕(桓王)으로 추존되고 태종대왕이 ‘연무성환(淵武聖桓)’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1795년(정조 19) 영흥 본궁(本宮)에 신주를 모실 때, 대신과 예조 당상관을 보내어 4월 27일에 본궁 이안청(移安廳)에서 신판(神板)을 만들어 4월 26일 본궁 정전(正殿)에 모셨다. 3남 1녀를 두셨다.
능은 정릉(定陵)으로 함흥 동쪽 귀주동(歸州洞)에 있으며 1360년 8월에 장례지냈다. 신도비와 표석이 있다. 1900년(광무 4)에 도의 책임자에게 명하여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비문과 글씨를 고종황제가 친히 썼다.
배위는 의혜왕후(懿惠王后) 최씨이니 본적은 영흥(永興)이요, 원나라에서 천호(千戶)를 받고 조선조에서 판문하(判門下) 영흥백(永興伯) 정효공(靖孝公)을 추증받은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봉작을 받고, 2월 24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의비(懿妃)에 추존되고 태종대왕이 ‘의혜(懿惠)’라 더 존호를 올렸다. 1795년(정조 19)에 영흥 본궁에 신주를 모실 때 대신과 예조 당상관을 보내어 4월 21일에 본궁 이안청에서 신판을 만들어 26일에 본궁 정전에 모셨다. 1남 1녀를 낳았다.
능은 화릉(和陵)으로 환조대왕과 같은 언덕인데 표석이 있다. 1900년(광무 4)에 도의 책임자에게 명하여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비문과 글씨는 고종황제가 친히 썼다.
사자는 태조고황제이고, 장녀는 정화공주(貞和公主)로서 삼사좌사(三司左使)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조인벽(趙仁璧)에게 시집갔다.
환조대왕은 따로 두 배위를 두었다. 한 분은 이씨(李氏)로서 완풍대군(完豊大君) 원계(元桂)를 낳았고, 또 한 분은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金氏)로서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를 낳았다.